추억

택시법 논란으로 추억에 잠기다

진이아빠 2013. 1. 23. 16:37

 

 이건 아마 신분증이 아닐까 싶다.

크기가 주민등록증 정도니.

 이건 운전자 옆좌석에 부착하는 자격증명서.

신원확인 의미도 있겠지만 운전기사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불,탈법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용도가 아닐까...

 LPG차량이라 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요식행위로 느꼈다.

 명찰과 내가 복사한 자동차 키, 5천 원 자비부담이다.

나는 고동색 순모 가디건에 흰색 와이셔츠, 넥타이를 매고 왼쪽가슴에 명찰을 달았다.

가스충전할 때 쓰던 카드다.

회사와 계약을 맺은 가스충전소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의 저편에 묻혀 있었는데.

 

최근 며칠 새 `택시법`을 놓고 국회와 정부간 이견이 표출돼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안이 대통령의 거부권행사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택시법이 운전기사의 처우개선을 위한 것이라면 꼭 필요한 법이겠으나 회사를 위한 법이라면 거부돼야 옳다.

택시회사들은 매년 증차나 에너지보조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정부에서 추가지원을 해도 기사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기사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는 완전월급제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오래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상황과 안 맞을 수도 있다.

 

***택시운전에 도전하다***

 

세월이 참 빠르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나는 2001년 3월 5일부터 6월 25일까지 3개월 20일간 우리나라 도시 중 국민소득이 가장 높다는 울산에서 회사택시 운전을 했다.

택시운전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몸도 마음도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2000년 3월 5일, 전날 저녁식사를 잘 하고 주무셨던 아버지가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정신적 충격과 그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산소에 석축쌓는 일이며, 끝없이 돋아나는 잡초제거에 그해 여름엔 어찌 그리도 많은 비가 내리던지.

아버지 생전 직접 고르신 선산인데 남향에 아늑한 곳이긴 하였으나 지관이 지정해준 곳은 다소 경사가 있어 많은 비에 혹시 유실되지나 않을까.

엄마 말을 지독하게 안 듣던 청개구리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잡초도 잡초거니와 아카시뿌리가 정지작업중에 섞여 들어갔던지 아카시는 또 어찌 그리 많이 솟구치던지.

뽑다뽑다 지쳐갈 무렵 이웃 효자 한 분이 `근사미`라는 제초제를 가르쳐주셔서 가을 무렵 온전한 잔디만 남기고 모든 잡초와 잡목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왕복 50km정도 되는 거리를 1주일에 최소 2회, 어떤 주는 일주일 내내 다녔던 적도 있었다.

주말이면 형제들과 바비큐 준비를 해가서 온종일 놀고 먹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단풍이 물들어갈 때쯤 몸은 안정이 되는데 공허한 마음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갓 숨을 거둔 아버지를 안고 절규했던, 온기를 온몸으로 느꼈던 그 느낌이 한 시도 떠나지 않았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힘들고 아버지를 따라갈까 까지도 생각했으니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 그 무렵 강원 태백에 강원랜드가 오픈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거기라도 가서 빠져버리면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현금 300만 원을 묶음으로 은행에서 찾아 왕복 500km인 강원랜드까지 한걸음에 내달렸다.

카지노에서 노름을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슬롯머신에 몰입하면 삶의 허무함, 잡념이 없어질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동전을 넣고 핸들을 당기고 동전을 넣고 핸들을 당기고...단순반복되는 게임이지만 처음에는 몰입이 됐다.

서너 번 다녔을까, 그건 그냥 나의 삶을 소모하는 것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택시운전이 굉장히 힘들고 안전을 위해서는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누가 얘기해줬다.

옳커니, 이걸 한번 해보자.

서류를 준비하고 시험을 보러 갔더니 네 번 낙방하고 다섯 번째 시험보러 왔다는 어떤 분을 만났다.

 

"이 시험 우습게 보고 오셨죠, 장난 아닙니다. 합격률 50%밖에 안 돼요"

 

과연 그랬다.

그 이유는 간단해보였다.

응시료가 1만 원인가 했는데 낙방률을 높이면 그들로 부터 거둬들이는 응시료가 쏠쏠하기 때문에 일부러 어렵게 출제한단다.

`하다하다 안 되면 택시운전이나 하면 되지`라는 말 함부로 할 말이 아니더라.

운이 좋았는지 단번에 합격하고 부산가서 교육받고 정밀검사까지 받은 후 택시회사를 물색하는데, 이거 또한 쉬운일이 아니네.

 

지인의 소개로 00택시를 찾아갔다.

회사관계자와 한 번, 노조위원장과 또 한 번 면접을 봐야 했고 합격여부는 추후통보해준단다.

제기랄, 18년 무사고에 거쳐야 할 과정 다 거쳤는데 추후통보라니...

알고보니 당시는 외환위기 때 어려움을 당했던 분들이 택시기사 지망을 많이 하던 때라 골라잡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모양이었다.

노조위원장으로 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나갔더니 잘 될 것 같으니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거였다.

 

음...이런 관문도 있는가 보다.

어차피 나는 술을 좋아하니 젓가락 하나 더 놓는다 생각하고 함께했다.

회사사정과 처음 택시운전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조언등을 장시간 설명해줬다.

그런데 그 양반 단골집이 보기엔 허름하나 술값은 솔찮았다.

이십 몇만 원이 나왔으니...

 

그렇게 해서 출근을 하게 됐는데.

새벽 4시~5시 사이에 맞교대자와 합의한 장소에서 차를 인수인계하더라.

첫날 차를 받아 길거리로 나섰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손님을 태울 수 있는지, 사납금을 채울 수 있는지 난감했다.

무턱대고 돌아다녔다, 난 내몸을 혹사하기 위해서 일을 선택했으니 죽자살자 돌아다녀야겠다 생각했다.

24시간동안 600km정도 뛰었던 것 같다.

 

사납금 납입하러 회사에 갔더니 많은 분들이 물었다.

`할 만 하더냐` `힘들지는 않더냐` `얼마나 벌었냐` `몇 킬로미터 뛰었냐` `쪽팔리지 않더냐` 등등...

자판기 커피 한 잔 나눠마시며 이런저런 질문에 모두 대답하고 교대하러 가면서 가스충전소 가서 가득채우고 세차한 후 인수인계했다.

00대학을 나온 아주 젊은 `사수`가 묻는다.

 

"첫운행 해보니 어떻던가요, 힘들지요?"

"할만 합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운전대를 놓고 집에 와서 누우면 초죽음이 되고 침대가 진동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너무나 괴로웠다.

3개월 20일동안 대충 이렇게 반복되는 삶을 이어갔다.

 

사납금은 차량에 따라 달랐는데 `똥차`는 싸고 `좋은차`는 비쌌다.

대략 9만 원에서 13만 원 사이였던 것 같다.

나는 노조위원장과의 술자리 때문이었는지 이력서내용 때문이었는지 새차를 배정해줘 비싼 사납금을 냈다.

통상 초짜들에게는 폐차직전의 똥차를 배정해준다는데 난 반짝반짝한 뉴 쏘나타 오토차량이었다.

사고는 한 번도 없었으나 앞바퀴가 터져 새바퀴값을 물어준 적이 있었다.

 

내가 운전한 택시는 콜택시였다.

장거리손님을 아주 선호하는지라 장거리 콜이 뜨면 잽싸게 무전기를 잡고 신호를 보내는데 난 한번도 안 걸리더라.

알고보니 거기에도 비리가 도사리고 있더라.

콜회사 아줌마가 돈되는 장거리는 1호차인 남편에게 몰아주는 부조리(?)를 저질렀더라는.

나는 가장 멀리 가본 장거리가 해안도로를 따라 해운대까지였다.

 

***에피소드***

 

택시에는 씨디플레이어가 없어서 씨디 노래를 테이프로 옮겨 갖고 다녔다.

낮에는 영화음악이나 올드팝, 경쾌한 노래등을 나지막히 틀어놓고 다녔고 밤에는 카페음악같은 분위기 있는 노래를 주로 틀었다.

어느날 밤, 고속터미널까지 가는 젊은 커플손님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남자는 내렸는데 여자는 안 내리는 거였다.

 

"손님, 왜 안 내리세요?"

"아, 네... 음악이 너무 좋아서...끝까지 듣고 내리면 안 될까요"

 

한 번은 새벽 3시 경 룸살롱이 즐비한 유흥가에 손님을 내려드리고 막 출발하려는데 남자 하나가 탔다.

뒷좌석에 타서 `00하이츠갑시다`하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다.

초등학교 친구였으나 나랑 동전으로 장난삼아 포커하다 큰돈들고 튀었던, 그 후 몇년간 잠적(?)했던 녀석이더라.

그도 나를 알아보고는 고개숙이며 외면하는데 아는체 할까말까 망설이다 모른체하고 말았다.

행색을 보니 거의 폐인 수준에다 술이 많이 취했더라. 그래도 00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인데...삶이 고달팠겠지.

 

어느 날 낮시간에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번화가 도로를 빈차로 지나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급히 차를 세웠다.

얼떨결에 세워서 태웠는데, 우리동네 식당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간 분이었다.

그분은 다른 사람과 공범으로 내 돈 400만 원을 사기치는데 일조했던 분인데 뒷끝이 좋을 리가 있겠나.

행색이 너무나 초라해서 12,000워 나온 차비를 받지 않았다.

돌아서면서 눈물을 훔치고 종종걸음으로 가더라.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그만두기로 마음먹으니 안 좋은 일들이 연속으로 생기더라.

술집들이 문닫을 새벽시간에 콜이 많이 터지는데...

하루는 콜을 받고 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손님이 안 나온다.

기다리다 안 나오면 그냥 갔어야 하는데 초짜라 무작정 나올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림에 지치니 화도 나고 혹시라도 먼 거리가 아니고 기본요금정도 나오는 거리밖에 안 가면 손해가 막심한데.

 

모 자동차회사 작업복에 명찰까지 달고 술에 취해 마담인지 종업원인지 여자와 다정하게 `빠이빠이`까지 하고 타더라.

6천 원 정도의 거리 어두운 주택가에 다다랐을때 하차를 요구해서 세웠는데 다짜고짜 시비를 걸더라.

주머니 여기저기 손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돈이 없어 차비 못주겠다`고 노골적으로 배째라네.

출발전부터 기다리다 지쳐 안 그래도 화가 나있던 참에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손님이 버티던 뒷좌석으로 가 그를 끌어내렸다.

조용히 주먹으로 옆구리 몇 대 때리니 소리도 못지르고 꼬꾸라지더라.

 

"야 임마! 양주 한 병값만 아끼면 부산까지도 가겠다. 앞으로는 택시비부터 챙겨놓고 술먹어라 **야!"

 

오늘같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어둠이 막 내리는 시간이었는데 이런 일도 있더라.

자동차부품단지에서 손님을 태웠더니 경주방면으로 가자는 거였다.

00동 파출소 부근을 막 지날 무렵 갑자기 파출소앞에 차를 세우라더라.

파출소에 들어가더니 `택시 기사가 불친절해서 %*@#` 횡설수설하면서 `못가겠다`네.

나랑 말 한 마디도 안 하고 전화통만 줄곧 붙잡고 누구랑 통화하며 왔는데 웬 불친절? 결국 차비도 못받고 시간만 허비했던 아픈 기억.

알고보니 야근후 종일 술마시고 만취상태, 파출소 직원은 소 닭보듯...대책없더라.

 

택시운전 참 고달프더라.

 

***얼마나 벌었을까***

 

사납금이 정말 부담스럽다.

차를 인계받고 나서는 순간 `언제 사납금을 다 채우지`하는 생각 뿐이다.

친구들 전화오면 가서 만나 족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모임도 하고...

가장 많이 벌었을 때 사납금을 채우고 13만 원이었던가, 적게벌었을 때는 2만 원도...쩝

한 달을 채우면 월급을 받는데 40만 원 남짓되더라.

 

온종일 딱 땅이 젖을 만큼 내리는 비.

회색하늘이 마음도 우중충하게 만드는 그런 날.

날궂이 곡차라도 한 잔 해야 하는데 대작할 사람이 없다.

자작해도 괜찮은 날이 있지만 오늘같이 추억속으로 빠져드는 날이면 권주가가 필요한데.

추억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우겨본다.

 

아내가 싸 준 김치김밥 한 줄과 보온병에 든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를 혹사했던 기억이 새롭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