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수험생들아, 힘내라!

진이아빠 2011. 11. 12. 11:55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단 몇 시간만에 인생길이 갈린다는 건 슬픈 일이다.

누구는 명문대에, 누구는 낙방하여 입시를 포기하거나 재수생이 된다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다.

이 시기만 되면 생몸살을 앓았던 나의 수험생시절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프다.

 

1975년

고3이었던 나는 예비고사를 경남 마산까지 관광버스를 타고 가서 봤었다.

당시에는 울산이 광역시가 아니라서 도청소재지인 마산에 전날 도착해서 여관방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시험을 쳤었다. 어린마음에 여행가는 기분으로 가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나는 가는 내내 착잡했었다.

 

여관방에서 별난 아이들은 소주를 사다 마시며 하나라도 더 맞혀보겠다고 책을 펴든 아이들에게 권하기도 하고, 복도를 왔다갔다하며 떠들기도 해서 선생님들이 단속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의사도 법조인도 되어 지금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인문계고등학교를 가라는 형님들의 권유로 막상 가긴 했으나 집안사정이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비고사도 대충보고 그냥 취직이나 해야겠다 생각했었다.

 

시험이 끝나자말자 청소년기의 반항아도 아닌데 가출을 결행했다. 착하디 착한 아이들과 사전모의도 없이 불쑥 집을 나와버렸다. 주머니에 가진 돈도 없었고 달랑 몸만 나왔는데 경북 영덕이 고향인 친구가 자기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백암온천이 고향인 친구, 영덕이 고향인 친구 그리고 나는 후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지않고 그냥 동행했을 뿐이었다. 영덕에 도착해서 영덕친구의 친구집 조그만 골방에서 라면으로 연명(?)하며 합숙아닌 합숙을 하기 시작했다.

 

편모께서 쌀가게를 하는 영덕친구는 생활비를 조달해오는데 어떤방법으로 조달하는지에 관해서는 묻지않았다. 엄마에게 손을 벌렸는지, 쌀가게에 진열된 쌀에 손을 댔는지 지금까지도 알 수는 없다. 약 열흘을 그렇게 보내면서 우리의 미래에 관해 갑론을박 뜬구름잡기식의 난상토론도 제법 진지하게 했다.

 

열흘이 넘어가자 걱정하실 부모님생각도 났고 김이 모락모락나는 집밥생각도 간절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께 혼날 생각을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어차피 돌아가야할 곳은 집인데...

 

집앞까지 왔으나 들어갈 용기가 없어 대문간을 서성이는데 마침 큰형수께서 나를 발견하고 손목을 잡아끌길래 못이긴척하고 들어갔다. 부모님은 예상외로 크게 혼내지 않으셨다. 아마 방황하는 막내의 속마음을 읽으셨으리라.

 

예비고사 발표가 나고

형님들은 대학을 가라시고, 부모님은 말씀이 없으시고, 난 우리집 형편상 대입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원서제출을 하지않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담임선생님께서 우리집엘 오셨다.

 

담임선생님은 최고 명문대를 나오신 분으로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동네에 사촌형제를 비롯한 친인척들이 많이 계셔서 아버지와도 잘 아는 분이셨다. 선생님은 국립대에 보내면 등록금이 적게드니 원서를 내보면 어떻겠냐고 아버지를 설득하시고 아버지는 특별한 말씀이 없으셨다.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나는 대학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년 후 우여곡절끝에 대학을 가긴 했지만 이맘때면 가슴아픈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수험생들께 하고픈 말은

요즘같이 업종이 다양한 시대에 굳이 대학을 가지않아도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는 것.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꿀릴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싶다.

 

지금 국내굴지의 자동차회사에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고졸로 취업하여 수 년, 수십 년 근속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대학은 그냥 간판이었을 뿐 자기만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능점수가 좋은 사람은 좋은대로, 나쁜사람은 나쁜대로 자기역할이 기다리고 있으니 절망하지말고 꿋꿋하게 미래를 위해 희망을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가지못하는 또 다른 길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길 바라면서 시 한수 옮긴다.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갈 때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한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적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겠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가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이어져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를 의심하면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