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想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비리관련 PD수첩을 보고

진이아빠 2010. 4. 8. 11:38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어언 20여 년. 생애 처음으로 31평형 아파트를 분양받아 식구 달랑 셋이 단촐하게 입주했더랬죠. 식구에 비해서 너무나 큰 면적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아파트가 입주예정자의 선호도에 맞춰 평형을 결정했으니 분양받는 사람은 13평이나 18평 정도의 아파트를 선택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노태우시절 200만 호 주택건설이라는 구호아래 속도전을 하던 때라 중국산 시멘트를 썼네마네 말도많고 탈도많던 시절이었습니다. 입주하고 꼼꼼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하자가 보였습니다. 공용부분도 전용부분도 제법 눈에 띄었지요. 아직 관리소장은 없고 시공업체에서 직원들이 상주하면서 하자보수를 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ㅎ공영이란 유명건설사에서 시공했고 입주자들의 기대는 컸지만 내 눈에는 뭔가 2%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후일 입주자대표를 뽑는다는 방이 붙었는데 `옳지 하자보수를 위해서 뭔가 역할을 해야겠다` 싶어 입후보를 했습니다.

 

어라? 근데 그게 뭔 이득이 있는지 입후보자가 저를 보함 6명이나 되네요. 하는 수 없이 관리실 마이크로 정견발표를 하고 주민 직접투표를 하게 됐습니다. 선거관리를 시공사 직원과 동별 임시지원자들이 맡았고요. 참 우스운 일이지만 요즘 아이들 반장선거하듯 그렇게 하여 제가 당선이 되었더군요.

 

우선 동별 대표를 뽑아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을 완료하고 각자 경력이나 역량을 파악한 후 역할을 맡겼습니다. 군대가 그렇듯이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이 모이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아파트 시공을 한다고 생각하고 거꾸로 부분별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ㅎ중공업에 근무하는 분들이라 능력들이 대단했고 퇴근 후 관리실에 모여 함께 또 따로 사진도 찍고 샘플채취도 하고 그렇게 조사해보니 사진만 약 600여 장이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A4용지에 붙이고 일일이 부가설명을 첨부하니 책 한 권분량이었습니다.

 

본사에서 중역을 불러 내리고 세심하게 설명을 하니 대부분 수긍을 했고 하나씩 하자보수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과 때로는 언쟁도 때로는 술잔도 기울이며 하나하나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절대 그들에게 밥 한 그릇 술 한잔도 얻어먹지 않는다는 것.

 

그 결과 소소한 하자들은 2년 여에 걸쳐 거의 완벽하리만큼 보수되었더랬죠. 한참 후에 우리 아파트 부지인데 바위산이라 깎지 못하고 버려둔 부지를 찾아내 그 땅만큼 금전적 배상을 받아낸 일까지 합하면 입주자대표들은 대단한 일들을 완수했다고 봅니다.

 

공동주택은 규정,규약에 의해 관리가 되는데 입주자들의 무관심이나 무지가 부실이나 비리를 낳는다고 생각하기에 어제 방송된 PD수첩을 보면서 아쉬웠던 것은 이권개입을 감시하는 `조직적인 능력`을 주민들이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주택관리사제도가 생겨 나름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딴 관리소장이 있고, 관리소장이 입주자대표회의의 입김에서 벗어나 양심껏 관리를 한다면 부조리의 굴레에서 다소 자유로울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수 억에서 수 십억의 공사를 하면서 리베아트를 챙기는 어제 방송을 보면서 지난 날이 생각나서 긁적여 봤습니다.

 

저는 당시 연임했는데, 이유는 하자보수를 완료할 때까지 일해달라는 거였습니다. 여담이지만 `92년 대선 때 정치권에서 상품권 한 장도 주는 사람이 없더군요. 다른 아파트에서는 입주자대표에게 이런저런 썸씽도 있더라는 말들이 많던데^^;;

 

정말 단 한푼의 인센티브도 없는 그 일을 우리는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대표 6명이 거의 새벽까지 지하실 등을 돌아다니며 사진찍고 메모하고, 그짓을 2년 여 했거든요. 나중에 관리소장과 경리를 뽑고 난 후 관리실에 제 사비를 털어 전동타자기도 사 줬어요. 이유는 공정하게 열심히 일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