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가 저무는군요
며칠째 궂었던 날씨가 오늘은 아침부터 쾌청했다.
바람이 다소 강했고 기온이 뚝 떨어져 야외활동하기엔 조금 움츠려지는 그런 날씨였다.
여기는 봄비같은 가랑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높은산 정상에는 눈이 내렸나보다.
오늘은 까치설, 섣달 그믐이다.
예로부터 오늘밤 잠자면 눈썹이 센다는데 동지섣달 긴긴밤을 뭐하고 새야 할지.
머리가 희끗희끗 셌는데 아예 푸욱 자고 눈썹도 하얗게 세면 오히려 구색이 잘 맞아 보기좋을까.
어릴적에는 설날이 너무나 기다려져서 말 그대로 손꼽아 기다렸다.
"엄마, 몇 밤 자면 설이야?" 거의 매일 잠자리에 들 때마다 엄마에게 귀찮을 정도로 물었었다.
새옷이나 운동화같은 설빔이 기다려졌고 무엇보다 쏠쏠한 건 세뱃돈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전에는 `환`단위의 동전과 지폐가 있던 시절이었고 10환이 후일 1원과 비슷했다.
100환짜리 동전이라도 한닢 얻으면 날듯이 `점빵`으로 뛰어가 눈깔사탕을 오물거리며 행복해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5원, 10원 정도만 손에 넣으면 재벌부럽지 않았다.
세뱃돈이 20원 넘으면 요즘말로 대박이었고 엿이나 사탕을 한참동안 사먹을 수 있었다.
화약을 넣어 터트리는 딱총이나 폭음탄 같은 것도 마음껏 살 수 있었고 풍선도 인기품목이었다.
제기나 민속팽이를 만들었고 방패연이나 가오리연도 아버지와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날리곤 했다.
초등학교 무렵엔 `나이롱` 소재로 만든 옷이 등장했는데 지나고보니 최악이었다.
나일론 겉재료에 속에는 스폰지가 충전되어 있었는데 이게 불에는 쥐약이라 한동안 말썽이었다.
추운겨울 불장난은 시골어린이들의 필수놀이메뉴인데 쥐불놀이 몇 번만 하고나면 온통 `빵꾸`였다.
당시 뉴-패션이라 사달라고 조르니 사주긴 했는데 설을 채 며칠도 지나지않아 버려야할 정도로 구멍이 쑹쑹 뚫려버렸으니 부모속이 오죽했으랴. 그때까지만 해도 접해보지못한 소재라 이게 왜 빵꾸가 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듯싶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 옷걱정은 뒷전이었는데 집에 오면 뒤지게 혼나는 일상의 반복.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오늘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을 용케도 살아왔네.
어릴적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명절이 몇 년전부터 별로 반갑잖은, 피하고싶은 날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 중심에는 부모님이라는 구심점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되었다.
6남2녀나 되는 많은 형제자매가 있지만 부모님을 찾아뵐 때만큼 마음편한 곳이 없으니 섣불리 찾아가기가 어려워진 이유가 큰 것 같다. 고향에 있을 땐 명절 하루이틀 전날 만나 시장도 보고, 음식도 만들고, 부모님 산소에도 갔는데, 이사온 후 먼길 갔다가 당일 돌아오기엔 너무 힘드니까 발길이 뜸해질 수밖에 없다.
못가면 마음도 자연스레 무거워지고 머릿속엔 옛추억들만 어지럽게 떠올라 괴롭고 힘들다.
부모님의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고, 허전하고 그립다. 핵가족시대에 어찌보면 못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추억이 그곳에 남아있다는 의미리라.
이렇게 또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나잇값 못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