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신경민 논설위원 퇴임인터뷰 -방송기자연합회-
30년 8개월의 기자생활
안식년 중이신데 어떻게 보내고 있으신가요? 그간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이화여대 겸임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겸임교수라는 것은 시간강사의 높임말이라고 하더군요. 이번 학기부터는 고려대에서 방송뉴스제작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고려대 대학원 석사과정 중에 있기도 하죠.
그리고 강연을 많이 다닙니다. 주로 경향 각지의 대학교, 시민사회 단체, 기업의 노조에서 꾸준히 요청이 들어옵니다. 돈을 많이 주는 기업에서는 강연 요청이 아예 없어요. 이건 시사하는 바가 크죠. 제가 설파한 올바름과 언론의 정도를 반기업으로 해석한다는 뜻일 수 있구요.
다른 면에서는 그만큼 정치권력의 힘이 막강해서 기업이 눈치를 본다는 뜻입니다. 선거와 투표를 통해 아무리 국 민들이 나무라고 꾸짖어도 정치와 사회의 기조는 그냥 그렇게 가는 겁니다. 그러니 돈은 못 벌었지요.(웃음) 주로 학생회, 언론학과나 언론준비반, 대학 커리큘럼 과정, 시민단체와 연구소 등 돈이 모자라는 곳에서 제 얘기를 좋아합니다. 강연요청이 많이 들어올 때는 일주일에 세 네 번까지 있었어요. KTX를 많이 이용해 코레일에 돈을 많이 보태줬죠.
그렇게 다니며 깜짝 놀란 부분이 있습니다. 고향인 전주를 제외하고 부산, 경남, 대구에서 강의 요청이 많았습니다. 처음엔 의미를 잘 몰랐고. 6·2 지방선거 이전까진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지요. 지방선거 결과를 보고 나니 이해가 가더라고요. 지역이 계속해서 불만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수도권과 지역의 나뉨 현상이 아주 심각하고 그 중에서 부산, 경남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런 현실을 강연 다니면서 느끼고 있죠.
지금 강연만 하시는 게 아니고 동시에 학생이시기도 한데요.
가르치면서 정리하는 과정에서, 또 언론의 이론을 배우는 입장에서 느끼는 게 많이 있죠. 배우는 입장에서는 학문과 현장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업에게 필요한 연구가 상당히 축적됐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듯이 언론 현업과 학계는 서로를 너무 잘 모르는데다가 서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해묵은 문제를 그대로 갖고 있고 잘 안 풀릴 겁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학생들이 취업을 준비하면서 배우기 원하는 부분을 알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을 현업과 학계 그리고 학교가 제대로 제공해주고 있는가를 항상 묻게 되고 괴리를 느끼죠. 괴리를 어떻게 메워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스펙 쌓기를 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불쌍하기도 합니다. 취직이 되는 사람은 사실상 많지 않고… 우리의 현실 이자 큰 문제입니다.
학교를 오가며 그런 부분을 직접 체험하시네요. 기자생활이 정확히 올해로 30년이시죠.
그렇죠. 현재 정확히 30년 8개월이네요.
기자생활 30년을 마무리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시나요.
저 역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했으면 더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웃음) 그런 생각이 항상 들어요. 기회가 있으면 언론 현장, 특히 방송의 주변에 있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있죠. 한국사회의 흐름 속에 있어야겠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있지요.
기자생활 시작하던 순간, 기억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기억나죠. 기억할 수밖에 없지요. 전두환 정권이 막 시작되던 시점이어서 당시의 언론인 대량 해직 사태 때문에 시험에 합격해놓은 뒤 회사로부터 채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었습니다. 시험을 보고나서 사령장을 받을 때까지 대기 기간이 꽤 길어져서 해를 넘겼어요. 80년 초가을에 시험을 보고 81년 1월 15일에야 사령장을 받았죠. 그렇게 된 이유가 전부 정치적 문제였잖아요. 회사의 사정이나 우리의 뜻이 아닌 한국 역사의 흐름 속 한복판에서, 입사 때부터 역사와 정치의 격랑 속에 있었죠.
지금 언론사를 30년 이상 다닌 최고참 기자로서 초임 기자 시절의 자신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직장 초년생으로서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처음엔 다 어리버리 하게 시작하고…(웃음) 그 당시 정치상황이 너무나 험했습니다. 해직기자들이 선배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 가끔 함께 가서 살벌한 얘기들을 나누고 엉엉 우는 현장을 목도했습니다. 몇 시간 먹고 마신 뒤 가는 길이 달라지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해직된 대선배 댁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 침울한 분위기를 잊지 못합니다.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좋은 기자, 바른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입사 후 바로 보도지침에 직면하면서 언론의 현실을 체감했죠. 저는 시작한지 1년 만에 ‘청와대 사건’을 겪으면서 바로 내근기자로 몰려났죠. 이 사건으로 해직까진 아니지만 사회부에서 외신부로 옮겨 거의 5년 동안 스트레이트로 외신부에서 내근생활을 했죠.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언론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면서 회사를 다녔죠. 앵커를 하면서, 앵커 이후도 그렇고… 그 흐름 속에서 피해를 많이 받았었죠. 호남 출신이라는 것도 그렇고, 항상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와대 사건에 대해 조금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
취재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청와대경호실이 국가원수모독죄라고 하면서 저를 청와대 경호실로 소환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있을 수 없는 코미디 같은 일이죠. 81년 말 남대문 대한화재 해상 건물 화재 현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경찰 출입기자들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경찰이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 씨가 온다고 화재 현장검증을 막아서자 “무슨 청와대를 파냐, 청와대 좋아하네”라고 기자들이 항의했습니다. 경호실 간부가 그 중 키가 제일 큰 저를 지목해 국가원수모독죄라고 해서 청와대 경호실에 소환 됐었죠. 처음에 들어갈 때만 해도 맞아죽는 분위기였는데, 서울대 출신이라고 말하자 두드려 맞지 않고 걸어 나왔죠. 나를 소환한 간부가 서울대 ROTC 출신이었어요. 서울대 덕을 크게 본거죠. (웃음)
그 대신 회사에서 인사조치로 청와대에 성의 표시를 했죠. 그렇게 전두환 시절 동안 4년 8개월 동안 내근을 한 거에요. 전두환 말년에야 취재 현장에 복귀하게 되죠.
말씀 들어보면 초년 기자 시절부터 상당한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기자생활을 통틀어서 어떤 것이 가장 어려우셨나요.
방송기자를 평가할 때 취재, 방송 능력 같은 업무수행 요인이 무엇보다 앞서는 기준이 되어야 하죠. 어느 조직에서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저에 대한 평가 기준을 보면 앞서 말한 취재, 방송능력이 아닌, 항상 다른 기준이 있어요. 그건 우리나라 전 직장이 그런 분위기죠.
업무성취도를 보는 게 아니라 항상 다른 요인을 보죠. 지역, 학교도 있고, 개인적인 성향과 이념도 있고, 요새는 종교까지. 그런 사회에 살고 있지요. 그런 점이 항상 젊은 사람들을 불만스럽게 하죠. 일이 생기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지만 일은 일이고, 평가는 평가라서 전혀 다른 사이클과 논리로 돌아가죠. 그런 것들이 제대로 되는 것이 선진국일 텐데 우리가 선진국의 문턱에 못 들어가는 거죠. 그런 것들이 개인적으로도 괴로웠죠.
밖에서는 저를 황태자급 기자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회사내부에서 받는 대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부에서는 트러블메이커까진 아니더라도 트러블썸(Troublesome)이라는 표현에 적합할 만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나는 조용히 사심 없이 자리에 앉아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회사 상층부는 뭔가 주도적으로 불만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지도자급으로 봐왔습니다.
이번에 이력서를 정리해 보니, 공식적이고 가시적으로 인사 불이익을 받은 경우가 총 14번이더라고요. 불가시적으로 받은 불이익은 저도 잘 모르니까 거의 매순간 불이익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불이익은 직급이 올라가 부장, 부국장, 국장 그리고 그 이후와 은퇴하는 현재까지 계속됐습니다. 팔자가 사나운건지 모르지만 참 어렵고 힘들게 사는 거죠.(웃음)
저도 입사해서 처음 신 위원을 직접 뵈었을 때 엘리트 코스를 밟은 기자라는 인상이 있었던 반면, 보도국 생활을 하면서 접해보니 ‘반골기자로 분류가 되어 있구나’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청와대 사건도 있고, 호남 출신이란 점이 크겠죠. 또 한 가지는 회사 내지는 보도국 안에서 줄서기를 몇 번 거부했어요. 줄 서는 것이 기자 본령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해요. 줄을 선다면 우선 내부에서 떳떳하지 못할 것이고 밖에서 취재원을 정직하게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 만약 줄서기를 했다면 호남 출신이라는 배경과 청와대 사건 등 여러 가지 멍에를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신경민 기자하면 원래부터 잘하는, 잘난 기자라는 후배들의 인식이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굉장한 노력형 기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입사 이후 9시 뉴스에서 제 데뷔작이 1981년 5월 5일 어린이날 스케치였습니다. 특별한 이슈가 없는 그야말로 연례행사 스케치이고 난이도가 높지 않은 리포트였는데 그게 참담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죠.(웃음) 저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신문에서 일하는 학교 후배가 몇 년 후에 혹시 5월 5일 그 기사를 기억하냐고 묻더라고요. 기억한다고 했더니 저를 아는 선후배끼리 그 리포트를 보고 ‘신경민은 방송기자로 잘못 갔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하더라고요. 기사도 그렇고 리포팅도 그렇고 너무 엉망이라서…(웃음)
그걸 저도 느껴서 ‘이래선 방송기자로 밥벌어먹고 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죠. 잘하는 기자의 리포팅을 녹음해서 듣고 내 리포트도 녹음으로 들어보고 발음 사전을 갖다놓고 연습을 했죠. 그 당시 회사의 요청으로 이응백 인천대학교 명예교수가 방송 출연자에 대한 언어 교육을 왔는데 제가 그 분에게 면전박살이 났어요. 나를 지적하면서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라고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게 혼났어요.
발음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기사를 어떻게 써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스킬도 없고 테크니컬한 문장도 준비 안 된 기자라는 말을 듣고 노력했죠. 보이스 칼라 같은 것은 타고난 것이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죠. 취재도 따로 공부해야 하고 분야별로 공부해야할 것이 많았지요. 내 관심이 원래 외교나 미국이었고 법률도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노력했습니다.
취재하실 때 독특한 방법이나 철학이 있으신지요.
취재는 사람의 문제죠. 같은 사람에게서 어떤 말을 들을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신뢰관계의 문젭니다. 동시에 같거나 비슷한 취재원으로부터 똑같은 말을 듣더라도 얼마나 잘 알아듣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해도 영원한 취재 소스 곧 ‘빨대’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열심히 들으려고 하지요. 많이 알아야 잘 알아듣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고위층의 정보도 중요하지만 밑에서 굴러다니는 정보도 값지다 생각해서 중저위층 취재에 상당히 공을 들였죠. 이런 저인망 취재의 다른 강점은 중저위의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 커가면서 고위층이 된다는 겁니다. 길게 보고 세월을 투자하는 겁니다.
관료들도 장관, 차관, 국장들을 열심히 만나고 다니는 것은 기본이지요. 그러나 그 밑의 과장, 사무관들이 우리나라 정책을 사실상 주무릅니다. 고위층의 비위나 실상을 알려면 밑으로 가야 해요. 위에서는 절대 말도 안 해주고 확인도 안 해주지만 주사급 이하부터 여직원, 운전사들은 잘 알고 있죠. 그런 취재의 루프홀(Loophole)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잘 이용할 필요가 있죠.
지금까지 어두운 이야기였지만 기자생활 30년 동안 하며 보람있던 일을 포함해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기사를 썼을 때 개선이 되는 이런 부분들이겠죠. 아주 사소하게는 경찰서에 출입하면서 아무 죄도 없이 잡혀온 피의자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 결국은 진실이 드러나 풀려나게 했던 경우도 있고, 출입처에 나가 제도개선을 할 수 있는 기사를 쓴 것도 기억에 남죠.
남들은 방향을 잘못 잡아서 기사를 썼을 때 혼자 기사를 정확하게 썼을 때는 뿌듯합니다. 사실 기자로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 기자회견과 보도자료를 받아 기사를 썼는데 나만 잘못 쓰거나,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쓰거나, 남들은 모두 읽었는데 나만 못 읽었을 때입니다. 특종은 물론 중요하지만 공개된 자료와 말을 낙종하는 것을 더 가슴 아프고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같이 기자회견을 들었는데 나 혼자 잘 쓸 수도 있고 나 혼자 잘 못쓸 수도 있거든요.
그런 경험이 있죠. 경찰기자 시절, 제가 서울대 출입이 아니었는데 땜빵으로 서울대 총장 긴급 기자간담회에 갔죠. 당시 입시와 관련해 서울대 입장을 밝히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런 배경을 잘 모르는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들었어요. 그 당시 신문들이 1면 톱이나 1면 사이드 톱을 쓰는 굉장히 중요한 뉴스였지만 엉뚱한 기사를 썼고 보고를 하지 못해 결국 낙종을 했습니다.
그걸 겪으며 ‘명찰 단다고 다 기자는 아니구나’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죠. 우리말을 한다고, 그 자리에 간다고, 좋은 기사를 쓰는 게 아니에요. 좋은 기사를 쓰려면 기자로서의 자질을 갖추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실에 대한 백그라운드, 사안의 흐름을 알아야 하고,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는 등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합니다.
외교부와 검찰에 나가게 되면서 공개된 자료와 회견에서 키워드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아주 조심하게 됐죠. 특히 우리말에서는 토씨와 시제를 잘 들어야 합니다. 반어법은 물론이고 부정의 부정을 단순히 긍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긍정이라고 이야기하면 될 부분을 왜 부정의 부정으로 이야기하겠어요. 그 배경을 추가로 취재를 하면 수면 아래에 엄청난 사실들이 숨어있는 경우가 있거든요.
기자생활 30년을 하시면서 나에게 힘이 됐던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제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장기간 내근을 하다 법조에 나간 관계로 나이가 많이 들고 연차수가 많은 상태에서 처음 기자실이란 곳을 나갔습니다. 법조라는 출입처가 지금도 그렇듯이 기사와 회사 간 경쟁이 굉장히 심합니다. 당시 조석간이 모두 나오던 시절, 어느 날은 조석간 모두에 물먹은 기사가 나갈 때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날이면 회사에 별 기사가 아니라고 설명하지만 심정적으로 힘들었죠. 별 것 아닌 기사라도 좀 써보고 얘기하라는 비아냥을 뒤통수에서 듣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기자라고 똑같이 왔다갔다 하는데 맨날 물을 먹는 ‘상습 드링킹 기자’였습니다.
그럴 때 기자실의 동료들이 많이 가르쳐줬어요. 취재를 어떻게 해야 하고, 야마를 어떻게 잡아야 하고, 기사를 쓰는 요령부터… 세밀하게 검찰의 구석구석, 법원의 구석구석을 가르쳐준 그 당시 타사의 동료들이 있습니다. 후배도 있고, 대학동기도 있고… 그들이 지금은 각 회사의 톱 근처에 가 있거나 은퇴했죠.
물먹었다고 하면 끝이 아니라 물을 어디서 어떻게 먹었는지, 누가 의심가는 취재원이지, 왜 그렇게 됐는지 등 물먹은 자리의 현장 확인이 필요합니다. 백 퍼센트 알긴 어렵지만 취재원과 취재 경로를 확인해서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어떻게 보면 물 먹인 기자들도 제게 좋은 교사였습니다. 취재 요령 같은 부분을 많이 배웠어요. 취재원과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고 토씨를 왜 조심해야 하는지, 반어법을 어떻게 구사하는지,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고 현장에서 공부해야 하는 방법들이죠. 지금 제가 가르치는 것들이기도 하죠. 주로 신문과 통신 기자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앵커 데스크 앞, 클로징을 마주하며
사실 앵커를 한번 하신 건 아니고 여러 번 하셨죠
. 앵커 생활을 되돌아 보며 느끼는 소회와 앵커론, 트레이드 마크처럼 된 클로징 멘트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앵커는 부단히 했거든요. 입사 직후 새끼앵커부터 시작해 80년대 중반에는 아침뉴스, 저녁뉴스 단신 코너를 거쳐 90년대 들어와서는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도 하고, 아침뉴스앵커도 했고, 워싱턴에서 돌아와 라디오광장을 1년 하고 그 다음으로 평일 뉴스데스크를 했죠.
사실 클로징 멘트는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처음에 주말 뉴스데스크를 할 때도 매일은 아니더라도 간간히 했죠. 그때가 YS 정권이었는데 앵커멘트가 문제가 돼서 중도하차했던 전력이 있죠. 그때는 김현철 멘트 때문에 치욕적으로 짤렸습니다. 지금은 MB의 모든 것이 성역이지만 그때는 김현철에 대한 모든 것이 성역이었죠. YS는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용인을 했어요. 자기 혼자 감시감독이 안 된다는 기초적 현실을 이해했던 겁니다. 언론이 지적하는 것에 대해 YS는 무척 경청을 했고 제 뉴스와 관련해서도 몇 개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런데 김현철에 대한 문제는 못 참았던 거죠. 김현철 문제에 대해 클로징은 아니였고 코멘트를 했을 때, YS 측근들이 일제히 나서서 앵커 제거작전에 들어갔고 제거가 되었죠. 그 때는 어렸고, 출입기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입처로 자연스럽게 돌아갔지만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어서…(웃음) 앵커가 갑자기 마이크를 놓고 사라지니 모든 사람 눈에 표시가 났고 조용히 사라지기에는 너무나 큰 국가적 사건이 됐지요.
저는 기자 초년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앵커를 하면 그냥 절대로 원고 읽는 앵커는 거부하겠다, 그리고 앵커를 하려고 내외부에서 운동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죠. 왜냐면 우리나라 앵커들이 대부분 그냥 원고를 읽는 편이고 수없이 많은 선후배 앵커들이 지나가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글쎄요… 존경하지는 않지만 KBS 박성범 씨 정도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앵커를 하려고 추구하지 않는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왜냐면 대부분이 그렇고 그런 앵커였기 때문입니다. 혹시 앵커가 되면, 일정 부분은 편집권도 행사하고 내가 가진 학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앵커멘트를 쓰겠다는 원칙이 있었죠.
앵커 관련보다도 더 큰 대원칙이라면 내가 핍박을 받더라도 보직이나 자리를 위해서 구걸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습니다. 내가 절대로 무릎을 꿇고 줄을 서서 내 진급이나 보직, 특파원이나 출입처 등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원칙이 있었죠. 그 원칙을 어기면 취재나 기사작성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그 원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앵커를 가질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있지 않죠. 방송이 시스템적으로 독립적이지 않고, 지배 권력이 되었건 야당 권력이 되었건 정치권이 방송을 정권의 전리품이라 생각하는 그런 관념이 지배하지요. 제도적으로도 그렇게 되어있는 상황에서 좋은 방송, 좋은 앵커, 좋은 기자가 나오기는 어려운 조건이라고 봐요. 특별한 경우에나 나올까 말까 한 것 같아요.
촌철살인의 클로징으로 유명하신데 이에 대한 동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좋은 질문이네요. 이건 묻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웃음) 대개 둘로 나뉘죠. ‘아주 좋다’ ‘앵커 저널리즘이다’는 사람들, ‘쓸데없는 짓을 한다’ 또는 ‘저러다 다치지’라면서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건 방송의 역할, 앵커의 역할과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인데 방송이 철저하게 정권의 부속품 내지는 장식품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저런 앵커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고, ‘신(辛)의 독단’이라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관을 객관화하는 또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렵게 이야기해서 누가 알아 듣겠냐’는 사람도 있죠. 찬성하는 사람들은 앵커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저널리스트다운 앵커로선 처음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하죠. 신만의 독특한 시각이 돋보인다는 사람도 있고…
회사 내부의 반응이 물론 중요하지만 대중의 반응이 더 중요합니다. 뉴스를 진행할 때는 잘 몰랐고, 뉴스를 그만두고 나서 2년 반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중의 반응을 직접 느꼈죠. 20, 30대 뿐 아니라 10대 팬을 볼 수 있어서 약간 놀랐습니다.
앵커 멘트를 쓸 때, 쉽게 쓰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쉽게 쓰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일부러 약간 어렵게 쓴 것은 법률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너무 단정적으로 쓰면 명예훼손 등 법률적 문제에 걸리거든요.
과도하게 일반화, 단순화 되면서요.
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약간 애매하고 어렵게 썼어요. 이게 글이 아니고 말이지만 행간을 읽어야 하는 정도의 수준을 유지한 적이 꽤 많아요. 그러다 보니 비유법이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직유와 은유도 많이 들어가고… 어느 사람들은 ‘문학을 하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명예훼손 걸리면 꼼짝 못하거든요. 약간은 어렵게, 약간은 애매하게 상당히 많은 비유를 쓴 건 그런 이유인데 제가 깜짝 놀랐던 부분이 일반인들이 상당히 정확하게 내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죠. 왜 그런지 생각을 해 보니 아마 다시듣기 때문이 아닐까. 한번만 듣고 끝났으면 모를 수도 있죠. 사실 제가 주로 상정한 시청자는 40대 이상입니다. 전두환을 좀 아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다시듣기를 하면 말도 있지만 글도 있잖아요. 아마 그런 것 때문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진심은 이것일 것이다’라며 제 뜻을 곡해하는 경우도 있었고, 논란이 생기기도 했는데 물론 틀린 경우도 있죠. 진실이 아닌 경우도 있는데 문학작품과 마찬가지로 기사도 던지고 나면 우리 것이 아니라 시청자의 것이고, 그들의 해석이 틀릴지언정, 그게 대다수가 되면 고치긴 어렵죠. 내가 나가서 설명을 하고 해명을 하더라도 안 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10대, 20대의 팬들이 많았고, 그 사람들이 이해를 했다는 사실은 의외였죠.
어쨌건 논란을 일으킨다는 점, 곧 노이즈 마켓팅에선 성공한 것 같아요. 방송저널리즘의 새로운 차원, 경지를 보여 준거죠. 단순하게 ‘누가 어떤 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다’와 같이 인포메이션을 전달하는 수준이 아닌, 방송저널리즘이 사회현안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생각과 논란을 제공했다는 점에선 새로운 시도였다고 봅니다.
소신있는 발언이 공감될 때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통쾌한 반면에 뉴스는 객관성이 중요한데 위원님의 발언은 주관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위험이 물론 있죠. 주관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 사실은 제 나름대로 몇 번, 더블체크를 하죠. 나아가 트리플체크, 쿼드체크, 펜타체크를 하죠. 가령 제가 아는, 주변에 있는, 기자들에게도 물어보는 것은 물론이고, 타사 기자, 제가 아는 취재원이나 친구들, 교수들에게 확인합니다. 팩트가 틀린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논리도 역시 체크를 하죠. 논리가 항상 맞았다고 자신하지는 않습니다. 몇 번 어필이 들어왔고 소송은 한 건 있었습니다. 조선일보가 장자연 관련 코멘트와 관련해 본부장과 보도국장, 앵커 셋을 걸었죠. 그 소송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진척은 별로 안 되고 계류만 되어 있죠.
사실과 논리에 대한 체크는 급하게 하기보다는 시간을 갖고 여러 번 체크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통해 ‘주관의 객관화’라는 작업을 반드시 하죠. 가령 4천만 중에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는 그런 거 몰랐지’하는 깜짝 쇼는 안했다고 생각해요.
클로징 멘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멘트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만 꼽으라면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날 멘트는 제가 멘트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을 하다 몇 사람에게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하겠냐’며 써 달라고 했어요. 키워드를 주거나 써서 보내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은 제가 다시 썼습니다. 마지막 날 멘트는 제 앵커 일 년 동안의 원칙을 30∼40초안에 담아야하기 때문에 필요한 단어와 논리를 더해 정교하게 쓴 멘트입니다.
용산 사태가 있던 날 저녁에 나간 멘트는 약간 기교를 부려 시적으로 썼습니다. 또 1월 1일의 KBS 제야방송에 대한 비판 멘트에는 제 평소의 소신, 철학, 언론적 관점을 다 담았었죠. 화면의 사실과 진실이라든지, 방송의 구조 등 평소에 늘 생각하던 것을 그날 다 쏟아 부었죠.
마지막 앵커 멘트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동안의 제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이 원칙을 앞에 놓고 기자 신경민에게 백점 만점에서 몇 점을 주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원칙은 어떻게 세워졌나요?
글쎄요. 점수는 잘 모르겠고… 만점을 받을 순 없죠. 그리고 이 원칙은 직간접 경험과 생각 그리고 공부를 통해 꾸준히 만들어졌습니다. 자유, 민주, 약자 배려, 힘에 대한 견제… 자유와 민주는 어느 사회나 당연한 것이고, 힘에 대한 견제는 언론이라면 분명히 해야 하죠. 이때의 힘은 정치권력 뿐만이 아닙니다. 정치권력이 중요하지만 권력은 모든 분야에 다 있기 때문이죠. 약자배려는 요즘 모두가 이야기 하는 것이죠. 약자를 배려하지 않고 힘 있는 놈만 지배한다면 시스템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결론이 난 것이죠.
아는 이들 특히 저를 잘 아는 후배들이 가끔 ‘잘 나가다가 왜 느닷없이 안전입니까’ 물어보기도 합니다. 안전이란 상당히 넓은 개념입니다. 영어로는 세이프티(Safety)라고 할 수 있지요. 추상적이고 높은 차원에서는 안보(Security), 곧 국가안보에서 시작해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낮은 차원에서는 집 앞 골목길 치안까지 들어갑니다. 안전 개념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잡 시큐리티입니다. 20대의 직업적 안전 곧 취업이 물론 제일 중요하지만 50대의 잡 시큐리티도 중요하죠. 약자배려와 중복되는 복지차원의 안전도 중요하고, 좀 더 주변적으로는 도로 공사에서의 안전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안보를 아주 튼튼하게 해놨지만 집에 들어가다 집 앞 맨홀에 빠져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물론 환경을 포함합니다. 안보 굳건하게 한 뒤에 환경 오염, 환경적인 재해가 생겨서 일반 시민들이 우울한 삶을 살거나 죽게 된다면 모든 게 헛수고라고 할 수 있죠.
잡 시큐리티와 관련해 아까 이야기한 부분에서 20대만 문제가 아니라 취직하기 위해 정신없이 스펙 쌓고 들어간 뒤 한 3년 있다가 잡 시큐리티가 보장되지 않아 직장에서 짤리면 뭐가 되겠습니까? 사람이 안전하게 곧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건을 조성해 주는 것, 안전이라는 개념은 이런 개념입니다.
제가 진행한 시간이 짧아서 안전이라는 화두만 던져 놓은 셈입니다. 안전에 관해 정치인도 그렇고, 여러 책임 있는 사람들이 안전에 관해 토론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안보도 중요하지만 안보보다 중요하고 포괄하는 개념을 찾다가 제가 찾아낸 것이 안전입니다. 기사 가치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유, 민주 등이 있지만 안전을 빼 놓고 이야기 할 수 없죠. 민주주의 됐는데 안전하지 않은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민주주의 됐는데 나에게 직업이 없다, 우리 동네 앞에 강도들이 들끓는다, 치한과 성추행범이 바로 옆에 산다고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안전이라는 것의 가치는 자유 민주나 힘에 대한 견제에 못지않게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날의 앵커 멘트에 대해 주변에서 좋지 않은 반응이 나왔을 때 어떠셨나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앵커는 객관적, 중립적, 공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법에도 방송은 그래야 한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에 찬동하지 못합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는 서양에서는 경험적, 이론적으로 이미 결론이 나왔죠. 엄밀하게 말해 객관은 존재하지 않고 중립은 불가능 합니다. 공정도 쉽게 기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힘 있는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로 쓸 위험을 안고 있지요. 그래서 이 말을 선점하는 측이 세게 주장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만큼 말이 유혹적이면서 근사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부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멘트를) 매일 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하는데, 평온한 시대 같으면 일주일에 한 두 번 할 수 있겠지요. 지금도 그렇고 한국 사회는 항상 격랑 속에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임진왜란 요즘 말로는 임진전쟁 이후 한 해도 조용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가끔은 코멘트가 필요 없는 날도 있긴 하지만, 그런 날은 문화적인 부분도 코멘트했습니다. 워낭소리 같은 멘트가 그런 사례입니다. 문화에 관심에 있거든요. 그런 것을 가지고 선후배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알죠. 그런데 나도 고집 있지.(웃음) 그게 옳은 어드바이스 같으면 듣는데, 경청할 만한 어드바이스 같지는 않아요. 알았다고,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넘어가죠. 거기에 면박을 주겠어요. 그것도 나름 저를 사랑해서 그러는 것인데…(웃음)
뉴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과거의 뉴스와 지금의 뉴스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뉴스 제작의 관점에서 보면 제가 주로 만들었던 80∼90년대와는 다른 뉴스가 지금 나가는 현실은 분명합니다. 제작기법은 괄목할만한 진전이 있었고, 요즘 탐사보도는 옛날엔 시도를 못했던 엄청난 발전이죠. 옛날 카메라출동식의 보도와 지금의 탐사보도는 종류가 다르죠. 또 하나 특징은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돈 걱정을 심하게 하는 점입니다. 옛날에는 돈 걱정은 안했죠.
제일 큰 변화는 인터넷의 발전이죠. 95년 이후에 인터넷이 상용화로 들어섰는데, 처음엔 조금 우습게 봤어요. 방송 종사자들이 이해하지 못했고, 메일링 정도 하는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기술로 생각했죠. 그런데 이게 지금은 커뮤니케이션을 지배하는, 우리 생활 내지는 우리 삶의 일부분에 동화됐죠. 언론의 주도권이 신문에서 라디오로 넘어가고, 이게 TV로 넘어왔을 땐 동화까지는 아니고,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 정도라고 할 수 있지요. 곧 TV없는 세상, 라디오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 없다는 정도였지만 지금 인터넷은 어떻게 보면 혈관 내지는 신경계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죠. 이런 차이가 있어요. 방송은 생활의 일부분으로 우리 옆에 있는 것이고, 인터넷은 우리의 몸속에 들어와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하루 24시간 속에서 방송 없이는 살 수 있지만 인터넷은 없이는 안 되는 겁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죠.
신문이건 방송이건 저널리즘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근원적, 생존적 문제에 부딪혀 있습니다. 과거의 뉴스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인터넷 그것도 디지털화된 인터넷입니다. 한두 가지만 바꾼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버렸기 때문에 인터넷을 고려하지 않고 세우는 정책들, 편성이 됐건 편집이 됐건 뉴스방식이 됐건 간에 그런 건 생존할 수 없습니다.
현실은 이런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비즈니스 모델, 편집 모델, 취재 모델 등으로 구현해야 하는데 아직 만들지 못했습니다. 모델 작성에 우리 생존과 번영이 달려있다고 봅니다. 저널리즘을 죽일 순 없고 절대 죽을 수 없고 죽지도 않습니다. 저널리즘이 반드시 제대로 살아야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모델을 찾아 내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는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이상한 환경 곧 종편 문제를 고민해야 하고 방송권력 장악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고민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은데 다른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죠. 뒤에 이야기 한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야 앞으로 진도를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현재의 방송 뉴스들의 인식이나 대처능력을 봤을 때 미래의 방송뉴스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시나요?
9시가 되면 떡하니 앵커가 하나 나와서 하는 시스템, 이런 편성과 편집으로는 존립하기 어려울 겁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도 이렇게 해서는 살기 어렵습니다. 앵커도 그렇고, 기자도 그렇고, 잘생긴 사람이 적당히 나와서 1분 20초 동안 하는 형식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 알게 됐습니다. 완전히 포맷팅부터 새로 바꿔야 돼요. 그리고 이제는 보게 하는 뉴스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측면에서 인포메이션도 있어야 하고, 시각도 있어야 하고, 뭔가 유익한 것,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들게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같은 식으로 우수한 인력들이 하루 종일 시간을 쓰고 수없이 많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아무도 보지 않는 뉴스를 만들어냅니다. 오래 지속할 수 없는 구조죠. 몇 년은 계속할 수 있겠지만 10년 후를 생각하면 이렇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이걸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죠.
인터넷 말씀도 하셨지만 SNS,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등장이 미디어 환경면에서도 큰 변화인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이번에 제가 의외로 받아들인 일은 ‘나는 꼼수다’입니다. 방송의 질, 특히 언론이 신성하게 생각해야 할 팩트 부분에서는 (맞다는) 자신은 없는데, 어찌됐든지 간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것을 다운받아 듣고, 이것을 듣지 못하면 화제에 끼지 못하고, 이런 상황이 된 건 전통매체가 실패 한 것이죠. 신문, 방송이 요즘 언론의 질 측면에서 제대로 못한 탓이기도 하고 기술의 기반이 달라진 탓입니다. 사실 팟캐스트는 제가 미국에 있던 2000년대 전반에 소개됐던, 십년 가까이 된 오래된 기술입니다. 미국에서는 꽤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하기도 하고, 스포츠 중계에도 활용하고. 우리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갑자기 주목받았죠.
언론이 기능을 제대로 못하다보니 이런 언론적 접근이 새 기술기반을 이용해 언론의 기능을 대신합니다. 그게 ‘나는 꼼수다’의 성공과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라고 봐요. ‘나는 꼼수다’의 홍보가 SNS와 인터넷 언론을 통해 이뤄지고 있고, 스마트 폰을 통해 다운받습니다. 완전히 플랫폼이 달라진 건데 그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환경이죠. 방송이 이걸 무시하면 존립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방송이 완전히 이걸 기반으로 하는 건 어렵겠지만 이쪽의 수요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방송이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지만 뉴스를 다시보기로 보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많지 않죠. 기업이나 관청, 정치인들의 필요에 의해 다시보기나 다른 플렛폼을 통해 접근할 때는 있지만, 뉴스에 대한 추가적 수요가 거의 없습니다. 방송 뉴스가 거의 도움이 안 된다고 보는 것이고, 그렇게 따지면 앞으로 어떻게 만들어야할까 고민이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라이브로 30~40분 정도 저녁 뉴스를 전달하는 포맷이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고요. 전혀 다른 플랫폼에 맞는 편집을 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겠죠. 우리가 이렇게 지금처럼 하더라도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정신과 기법을 들여와 앞으로는 섹션개념을 도입해서 섹션뉴스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지금처럼 1분 20초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여러 방식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사건이 터지면 요약도 해 줘야 하고, 직접 증언을 생생하게 들려줘야 하고, 과거와 미래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하고, 토론으로 전문가 찬반도 들어주고, 분석과 전망을 해줘서 시청자의 여러 입맛에 맞게 소식을 전해줘야 합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 식으로 뉴스를 하지 않으면 힘들 거에요. 그런 걸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앞으로의 이야기
제가 입사한 이후
YS, DJ,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중간에 대결적인 국면이 있었다 해도 언론 환경은 개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내가 입사한 이후에 이런 시절이 있었을까?’란 생각을 하며 기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역사는 왔다갔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죠. 역사에는 유턴도 있고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 것이죠. 그러나 큰 흐름으로는 발전하지요. 그것도 완만하게 발전합니다. 마치 스프링처럼… 어느 때는 스프링이 고르지 않아서 휘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하고 이러는 거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널뛰기죠. 고대나 중세에 비해서는 분명히 발전했죠. 그때는 임금이 ‘넌 좀 죽어야겠다’ 하면 죽는 거였죠. 운명적으로 이런 고르지 못한 널뛰는 시기에 살게 되면 쓸 데 없는 논란과 희생 속으로 들어갑니다.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닐까요.
기자들 사이에서는 아마 5공 때 이러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도 합니다.
5공화국 시절 보다 지금이 더 나빠요. 지금 느끼는 불만, 좌절감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 때는 경제적으로는 팽창하는 시기였습니다. 지금 정치적 민주화에 있어서는 훨씬 더, 굉장히 밑으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MB의 시대착오적인 행태는 지금 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게 경제적 위기와 겹쳐서 훨씬 더 어렵죠. 이 뿐이 아닙니다. 국제적 기반의 흔들림, 국내 정치적 퇴보, 국내외 경제적 위기, 기술의 발전이 겹쳐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하기 어려운 요인들이 겹쳐서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고 이 중에 제일 저항하기 힘든 요인은 기술일겁니다. 정치적 어려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통령을 괜찮은 사람으로 뽑으면 거의 일거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죠. 물론 정치문화적 문제는 풀리지 않겠지만…
종편의 등장이 단순히 ‘경쟁매체가 늘어났다’, ‘보수언론이 늘어났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면 방송의 퀄리티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이 듭니다. 실제로 담론을 보수적으로 끌고 가는 것도 문제겠지만 제가 걱정이 되는 부분은 시장지향적인 시장지향적인(Market-Oriented)언론사들이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이런 부분인데요.
사람들이 말로는 그렇게 안하지만 이미 공영방송 시스템은 무너졌습니다. 지금 눈앞에 가시화 되지 않아 우리가 못 느끼지만 더 이상 공영성 유지가 어려워진 시장의 상황이 조금 있으면 나타날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새로 진입하거나 이미 진입해 있는 상황인 지금, 방송사 경쟁이 너무 치열해져서 신입기자나 고참기자나 난장판에서 뒤엉키게 될 상황이 굉장히 높거든요. 그렇게 되면 아주 나쁜 상태로 갈 가능성이 있고요. 이런 난장판인 상황 역시 경제규모나 광고시장으로 봐서는 금방 올 것입니다.
난장판 속에서 ‘방송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는 여론이 생길 겁니다. 시기와 문제의 성격, 질을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방송사의 공영성이 사라지고, 난장판이 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고 구축하는 그런 상황이 오겠죠.
(대선, 총선이라는)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상황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고, 경제상황은 나빠질 것이 너무 분명하고, 광고시장은 축소 지향적으로 갈 것도 분명하고… 그렇다면 그런 여론이 나올 시기가 당겨질 가능성이 있겠죠.
세계경쟁도 만만치 않고 북한이라는 변수도 있고. ‘새로운 시스템을 위하여’라는 이야기가 멀지 않은 시기에 나올 것입니다.
사실만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인에게 정치적 중립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내가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오바마가 잘못 했다면 지적하는 기사를 엄숙하게 써야하고 매케인이 잘했을 때 맥케인을 칭찬하는 기사를 진솔하게 써야합니다. 똑같은 논리로 내가 MB지지자라고 칩시다. MB 잘하는 것만 써서도 안 되죠. MB 잘못한 것도 똑같은 비중으로 써 줘야 합니다. 누구를 지지하는 것과 상관 없이 오세훈을 비난하는 논리와 비중으로 곽노현을 비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앞에서 엄숙하고 같은 가치관과 비중으로 양 당사자에 대해 써 줘야죠. 그게 언론인의 일입니다.
퇴임 이후에 삶의 준비는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지금 당장 하는 일은 대학에서 강의 하고 강의 듣는 겁니다. 강연을 가끔 하구요. 제일 좋은 일은 비정규직으로 방송과 언론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게 1번이고, 가르치는 일은 꾸준히 해야 할 것이고. 강연도 할 것이고… 학생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선생을 계속 할지 말지 결정해야죠. 우선 책을 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강의와 강연은 어떤 상황에서도 할 겁니다.
다만 지금 시절이 좋지 않아서 뉴스나 방송을 좀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전혀 없습니다.(웃음) 시간이 좀 지나면 그런 제안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고 있죠. 방송을 다시 한다면 새로운 뉴스모델과 비즈니스 모델의 창출에 진력하고 싶습니다. 완전히 다른 매체에서 전혀 다른 모델을 만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프로그램을 맡는 수준에서 언론의 일이라면 토론보다는 시사현안 토크쇼를 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시사 토크 프로그램은 우리가 본격적으로 한 번도 안 해봐서 해외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모를 겁니다. 해외에는 종류가 많죠. 오프라 윈프리 식도 있고, 나이트라인 식도 있고. 시사를 가지고 책임 있는 정치인 당국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이죠.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관료, 정치인, 참모들…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책임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문제점이 뭐고 어떻게 고칠 것이고 등등입니다. 구름과 바람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죠.
라디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정치적 여건으로는 저에게 제안을 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봅니다. 정권이 바뀌면 제안이 있지 않을까 예상을 하긴 하지만 없으면 할 수 없죠.
내년에 정치권에서 또 러브콜이 있을거라 예상이 되는데,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첫 번째 소망은 방송 내지 언론 일을 했으면 하지만 금방은 안 될 가능성이 있지요. 모르지… 갑자기 저런 사람은 제발 방송을 했으면 좋겠다고 주민 투표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웃음)
마지막으로 그동안 함께 한 동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부탁드립니다.
표현의 자유의 핵심에 해당하는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요. 눈앞의 이익에 가려 큰 그림을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언론과 방송이 산업적, 기업적 측면을 당연히 지니고 있으니까 광고와 돈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광고와 돈을 지니고 국민 신뢰를 저버린다면 광고와 돈이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현재의 여건은 언젠가는 변하고 서슬 퍼런 논리들이 눈 녹듯 사라질 겁니다. 장기적으로는 방송의 독립적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누구도 우리 시스템을 만들어주거나 언론의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지요.
원칙과 기본으로 돌아가야지 이를 저버리면 언젠가 값을 치릅니다. 인생의 진리이자 진실입니다.
※ 신경민 논설위원 본인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